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이 16세 (문단 편집) === 위태로운 재위기간 === 왕 본인이 무능하더라도 [[명 4대 암군|시스템이 안정되어 있거나]] [[조지 1세|뛰어난 인재의 보좌를 받아]] 나라를 이끌어 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루이 16세는 '루이 14세에게 있어서의 [[장바티스트 콜베르|콜베르]]' 같은 인재들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더불어 당시 프랑스는 큰 문제를 가지고 있었는데, 루이 14세 때부터 심각하게 불균형화 된 프랑스의 경제구조가 백여 년의 시간을 보내면서 더욱 고치기 힘들게 된 것이다. 특히 [[루이 14세]]와 [[루이 15세]]가 강국 프랑스를 유지하기 위해 국가의 지불능력 이상의 돈을 여기저기서 빌려다 썼기 때문에 이 당시 프랑스는 엄청난 부채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당시의 재무장관들은 더 많은 돈을 빌려서 이 부채를 충당했다. 그나마 루이 14세 치하는 [[식민지]] 개척과 [[중상주의]], 수출 위주의 경제 정책으로 프랑스의 국부가 절정에 달한 시기였기에 국력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그 국부는 루이 15세 시절에 완전히 바닥난다. 루이 14세가 죽은 1755년쯤에 프랑스가 진 부채는 무려 20억 리브르에 달했다. 반면 프랑스의 한해 세입은 1755년 500만 리브르, 1756년 1,000만 리브르였다. 이걸 때워야 할 후계자 루이 15세는 800만 리브르가 필요한데 돈이 없어서 결국 채권자들에게 이자 갚을 돈 등을 포함한 3,000만 리브르를 또 빌려야 했다. 루이 15세는 정확히 59년이나 되는 긴 재위기간 중 친정을 펼친 것이 대략 11년 정도밖에 안 되고 치세 동안 또 전쟁이나 했다. 그렇게 쌓여온 부채는 루이 16세 치세에 와서는 심각한 상황에 이르러 국가 예산의 60% 이상이 100년 동안 루이 14세와 15세가 빌린 돈의 원금도 아닌 '''이자'''를 갚는 데에 쓰이고 있었다. 이 상태로는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리 없었기에, 루이 16세의 즉위와 함께 재정총감이 된 [[https://en.wikipedia.org/wiki/Anne_Robert_Jacques_Turgot|론 남작 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Anne Robert Jacques Turgot, baron de l'Aulne, [[1727년]] [[5월 10일]] ~ [[1781년]] [[3월 18일]])가 개혁을 시작한다. 뛰어난 [[경제학자]]이자 계몽주의자인 튀르고는 우선 모든 부서의 지출을 재정총감의 권한으로 일일이 검사하여 정부의 재정 적자 폭을 줄이고, [[미국 독립 전쟁]]에의 개입을 반대하며 위기에 빠진 프랑스를 살려낼 대대적 개혁을 준비한다. 1776년 1월에 왕실에 제출한 6개 포고령이 그것인데, 부역에 대한 귀족적 특권을 폐지하여 공평한 과세를 매기면서 길드의 독점권을 금지하여 백성들에게 경제적 자유를 주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런 튀르고의 노력 덕분에, 그해에 프랑스 정부는 네덜란드의 은행으로부터 4%라는 낮은 이자율로 돈을 빌릴 수 있게 될 정도로 국가 신임도가 높아졌다. 그러나 기득권을 침해받게 된 귀족들이 반발하였고, 자신은 물론 왕실의 지출을 일일이 검사받게 된[* 왜냐면 재정적자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왕실의 사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사실 왕실의 사치가 주된 지출은 아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도 왕비 치고는 검소한 편이었고 오히려 [[병림픽|누가누가 사치스럽냐]]를 겨루는 베르사유 궁정의 분위기와 잘 맞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만의 거처를 따로 마련했을 때 물론 고급 도자기를 놓는 등 사치품이 없잖아 있었지만 정작 그녀는 거기서 한 일이 가축을 기르고 우유를 짜는 등 왕비 치고 소박하고 투박한 일을 했다. 즉 이 두 사람이 사치광인건 아니다.]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까지 튀르고를 싫어하게 되면서, 결국 바로 그해 5월, 튀르고는 사임하고 개혁은 중단되었다. 또한 튀르고가 그토록 반대하던 [[미국 독립 전쟁]]에까지 지원과 개입이 시작하면서 프랑스의 재정문제는 끝장나버린다.[* 튀르고는 중상주의자인 콜베르보다 더 진보된 경제관을 갖춘 인물로서 최소한 재정 부문에서는 콜베르보다 더 나은 성과를 거둘 수도 있는 인물이었다. 중상주의 이후 근대적인 경제학자들은 한결같이 중상주의의 모순을 지적하며 더 나은 대안을 모색했기 때문이다. 튀르고를 포기한 것은 루이 16세가 스스로 목을 친 격이었다.] 결국 시간이 꽤 지나서야 루이 16세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전까지 면세특권을 누리고 있던 귀족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려고 했다. 사실 당시 프랑스 귀족들의 재산이라는 것은 정말로 어마어마해서, 그들이 조금만 양보해서 세금을 낸다면 '''국가의 빚을 한번에 갚고도 남았다'''.[* 하지만 그때 당시 성직자(당시엔 이들도 귀족)[* 정확히 말하면 성직자도 계급별로 신분이 달라서 하급 성직자는 대게 하급 귀족, 평민 등이었던 반면 주교 등 높으신 분들은 귀족이었다.]들은 '''"하느님도 세금을 내시나?"'''라는 말로 넘어갔다. 그리고 그들은 프랑스 혁명 당시에 대부분 목이 달아나면서 본인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댓가를 목숨으로 치렀다.] 당시 프랑스에서 면세특권을 누리는 귀족의 대부분은 루이 14세와 15세 시절 왕의 허가 아래 관직을 구입한 [[부르주아]] 계층[* [[법복]] 귀족이라고 부른다. 구 봉건 귀족은 [[대검]] 귀족.]으로서, 인구의 3%라는, 동시기 0.5% 남짓에 불과했던 영국 등과 비교했을 때[* 심지어 영국의 귀족들은 프랑스와 달리 세금을 이미 내고 있었기에 프랑스와 달리 대중의 분노를 크게 사지 않았다.] '''무지막지하게 많은 수'''에 달했다. 거기다 일부 지방의 귀족들은 납부되는 세금을 자신들이 착복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 부채 문제는 루이 16세가 절약-증세라는 정상적인 방법을 썼다고 해도 단기간에 해결할 수 있었다고 확신하기는 어렵다. 특히 이 막대한 부채가 프랑스 혁명정부에게도 상속되어 혁명정부의 재정을 압박하는 요인이 되었기 때문었으며 급기야는 교회 재산을 털어버리거나, 훗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이 [[디폴트]]를 선언하고 '''배째버리는''' 바람에 처리되었다. 사실 전통적으로 프랑스 왕실은 재정도 풍부하지 않은데 빚을 내면서까지 무리하게 써대는통에 재정 상태가 꾸준히 안 좋았고, 역대 프랑스 왕들은 이 부채 문제를 마찬가지로 '''그냥 배째거나''' [[성전기사단]]이나 교회 같은 '''만만한 놈들을 걸고 넘어져 그놈들을 삥뜯는''' 방식으로 해결했었다.[* 물론, 프랑스 왕들이 전부 이러지는 않았다. 저질 금화를 발행한 선왕들과는 달리 양질의 금화를 발행하여 재정 문제를 해결하려 한 [[샤를 5세]] 같은 경우도 있다.] 하지만 당시의 왕은 기가 약해서 배째라 식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신앙심이 깊어서 교회를 털어먹지도 못하는 루이 16세였고, 귀족들에게 세금 내라고 하려니 '''귀족들을 통제할 능력이 없었다.''' 왜냐면 프랑스의 귀족은 루이 13세와 루이 14세 치하에서는 기가 꺾였으나 무능한 루이 15세가 즉위한 뒤부터는 서서히 세를 불려나가, 당시에는 국왕의 명을 거부할 정도로까지 성장해 있었던 것이다.[* 위에서 나온 귀족의 면세특권 해제의 건이 그렇다.] 실은 루이 14세가 그렇게 군대를 강화하고[* 프랑스는 루이 14세 때 상비군이 40만으로 증가하여 유럽에서 가장 많고 강력한 군대를 보유했다.] 대외활동에 올인하며 사치를 부린 것은 전부 귀족을 제압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즉 후대의 프랑스 국왕들은 그로부터 '강력한 왕권'과 '파탄난 재정'이라는 유산과 부채를 동시에 물려받은 것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유산은 다 까먹고 부채는 불려나갔던 것이다. 참고로 루이 15세는 위에서 언급했듯 친정 자체를 10여 년 정도만 했고 그것도 애첩인 퐁파두르가 죽은 뒤에야 했다. 문제는 애첩에게 정치를 맡겼다가 노년에 들어서야 나라를 통치한다고 온 국왕이 정치를 못하니 실권을 얻어가던 귀족들이 지지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루이 15세는 못말리는 호색한이라서 귀족들에게도 평판이 나빴다.] 결국 왕의 권력은 실추에 귀족들의 실권만 높아지고 빚더미만 잔뜩 생긴 꼴이 되었다. 특히 프랑스의 [[절대왕정]] 자체는 국왕 스스로 강력한 군사력과 뛰어난 능력으로 이루거나 명시된 법으로 왕권의 강화를 꾀하는 것이 아니라 성직자나 길드, 귀족 등의 긴밀한 협력체제에 의하여 성립되는 것이었는데, 하물며 세력을 회복해가던 당시의 귀족들은 루이 16세에게는 버거운 상대였다. 다만 그렇다고는 해도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왕의 권위가 매우 강력한 절대왕정 국가였으며, 부르주아 계층 역시 강력하게 성장해 있었으므로 왕이 그들의 지지를 확보하면서 관료들이 제시하는 정책을 강력하게 밀어준다면 충분히 능력을 발휘하여 개혁에 도달할 수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군대도 부르주아 출신 장교들이 많아지면서[* 사실 이건 부르주아 집안 자제분들이 돈으로 계급을 산 경우가 많았었다. 이 때문에 귀족들이 불편해져서 1781년 부터는 '''4대 이상 귀족'''인 집안의 아들이거나 생 루이 훈장(루이 14세가 만든 무공 훈장) 수여자의 아들만 [[장교]]로 임용될 수 있게 법이 만들어진다.] 사실상 부르주아들이 군대를 장악한 거나 다름없는 상황인지라 부르주아들을 지지세력으로 끌어들이면 귀족은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다.[* 실제로 프랑스 군대는 혁명 이후 귀족들이 아닌 부르주아들 편을 들었다.] 하지만 튀르고 같이 우수한 인재가 무슨 정책을 내더라도 보수파 귀족들이 반발하면 루이 16세는 그들을 달래거나 제압할 생각은 안 하고 뒤로 물러서기 일쑤였으니, 개혁 시도→반발→퇴보가 반복되면서 도무지 개혁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개혁파들에게는 왕에 대한 실망감만 커지게 되었다. 튀르고의 후임으로 재무총감이 된 [[자크 네케르]]도 유사한 개혁안을 제출했다가 [[1781년]]에 파면되었고, 후임으로 온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Alexandre_de_Calonne|샤를 알렉상드르 드칼론]](Charles Alexandre de Calonne) 역시 개혁과 증세를 통해서 적자를 해소하려 했고 루이 16세도 적극 지지했으나, 귀족들과 가톨릭 교회 측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개혁안은 좌초되고 드칼론 역시 사임해 버린다. 그리고 [[1788년]]에 다시 복귀한 자크 네케르는 드칼론의 개혁안대로 하려고 했으나, 또다시 반발에 부딪치는 바람에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렇듯 루이 16세의 이런 우유부단한 성격과 답없는 현실에 진절머리가 난 네케르는 당시 프랑스 연간 국가예산안을 공개하고는 [[1790년]]에 장관직으로 물러난 뒤 '''아예 은퇴를 선언한다.''' 우리가 당시 프랑스의 경제상황을 자세히 알 수 있는 건 이 네케르의 덕이었다. 1789년 5월 5일, [[삼부회]]가 175년 만에 소집되었다. 그러나 제3계급인 부르주아 계급이 머릿수에 따른 표결권을 주장하면서 폐회되고, 6월에 제3계급들의 국민의회가 [[테니스 코트의 맹세|세워졌다]]. 그리고 그해 7월, '''혁명이 일어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